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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칭 정기예금증서(봉투)
국적/시대 일제강점
재질 기타
용도기능 상업
소장기관 조흥금융
유물번호 950009

상세설명

이 봉투의 앞면에는 정기예금증서가 기재되어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주식회사 한성은행과 정기예금하는 날짜가 기재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소화29년(1944)6월 25일로 되어 있다. <한성은행> 한성은행은 1897년 2월에 설립된 민족계의 근대적 은행으로 김종한(金宗漢)등 거물급 재계 인사들이 자본금 20만원으로 설립하였다. 민간인에 대한 환전 및 금융 업무를 주요목표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개점휴업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영업목표를 황실 및 정부재산의 관리와 금융으로 전환, 1903년 2월 합자회사 공립한성은행으로 개편하였다. 은행장에는 황실측근인 이재완(李載完), 부은행장에 김종한, 실무책임자인 우총무(右總務)에는 한상룡(韓相\龍)이 취임하고, 한상룡이 주동이 되어 은행실무의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 1905년의 금융공항으로 큰 타격을 받아 이해 9월 자본금 15만원의 주식회사 공립한성은행으로 변경한 다음, 일본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의 융자를 받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후 발행 주식 3,000주 중에서 다이이치은행이 800주를 인수함으로써 운영자금은 거의 전적으로 다이이치은행에 의존하였으며, 저리자금을 융자받아 고리로 대출함으로써 크게 이익을 얻었다. 이러한 계기로 일제의 자본과 경영인들이 참여하였으나,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였다. 1906년 3월 <은행조례>로 주식회사 한성은행이 되었으며, 이해 10월 수원지점이 개설되었다. 1907년에는 자본금이 30만원으로 증가하였으며, 1908년 2월 동막(東幕: 현재의 서울 마포)출장소를 개설하였다. 더욱이 1910년 국권상실과 거의 동시에 한상룡이 전무취체역(專務取締役)에 취임하였으며, 1911년 1월에는 친일파의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인수하여 일거에 자본금이 300만원으로 증자되었다. 1911년 평양지점, 1912년 대전지점, 1915년 8월 개성지점, 1917년 남대문지점, 1918년 부산지점?동경지점, 1919년 동대문지점?평양 대화정(大和町)출장소?서대문출장소를 개설하였다. 1920년에는 자본금이 600만원으로 증자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전개되자, 한국인들의 맹렬한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은행장은 이완용(李完用)의 형인 이윤용(李允用)이었으며, 전무는 이완용의 조카인 한상룡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 은행의 대주주들이 거의 친일파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금을 일시에 모두 인출해가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과 동시에 불어 닥친 1920년대의 공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다이이치은행으로부터 200만원의 구제자금을 융자받고, 1922년에는 일본인들의 경영참여를 허용하여 뒤에는 그들이 전무?은행장을 차지하였다. 더욱이 1928년 3월에는 발행주식 6만주 중에서 2만8000주를 조선식산은행이 인수함으로써 조선식산은행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일제의 민족계은행 통합정책에 의하여 1941년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을 흡수, 합병하였고, 1943년에는 동일은행(同一銀行)과 합병하여 조흥은행을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