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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칭 대한매일신보
국적/시대 대한제국
재질 기타
용도기능 신문
소장기관 조흥금융
유물번호 930007

상세설명

국채보상운동의 기치가 서서히 올라오는 시기의 신문으로 1면 잡보(雜報) 중에 국채보상운동 강연회 소식과 2면에 전풍훈(全風薰)의 기고문 등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1907년 2월 26일자 대한매일신보(제448호)로 국한문 혼용체 1장 4면의 신문이다. 아직은 불 붙지 않은 국채보상운동의 기운이 점차 신문 등 언론에 소개되어 관심권에 들어오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제1면 정우택(鄭禹澤)의 국채보상운동 강연 소식과 제2면의 독자 기고 등은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기사이다. 1면내용 국채연설(國債演說) 중서농단(中署農團) 등 본사(대한매일신보) 지사장 정우택 씨가 한국 국채 보상에 대하여 동포들을 소집하여, 국채 1,300만원이 밤낮으로 이자가 늘어서 한탄하던 중 대구 광문사 부회장 서상돈 씨가 충성심을 다하여 흡연을 끊자는 취지의 동맹을 발기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보상해야 한다는 등등의 연설을 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베셀: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