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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칭 대한천일은행일사
국적/시대 광복이후
재질 기타
용도기능 기타도서
소장기관 조흥금융
유물번호 912038

상세설명

-명칭 : 대한천일은행일사[大韓天一銀行日史] -편집인 : 이보호(李輔虎)/ 재단법인 한국상업은행 행우회 -발행자 : 신판국(申判國) -발행일 : 1959년(단기4292년) 10월 20일 -인쇄소 : 미상 -기타 : 62페이지, 국한문 혼용 인쇄본(주해본) 대한천일은행은 1899년(광무3년) 당시 탁지부 대신의 인가를 얻어 설립되었다. 이 일사는 창립 당시의 서무일지인 대한천일은행일사를 발견하여 한문으로 적힌 그 일사에 대하여 주석을 달아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제작된 책이다. 원본 일사는 낡은 백지 장책에 행서와 초서를 병용하여 필사한 것으로, 이 책은 1959년 대한천일은행을 계승한 한국상업은행(현, 우리은행)에서 금융사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생각하고 주해본으로 발간한 것이다. 이 일사에는 대한 천일은행이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은행 명칭 제정부터 시작하여 복무규율의 제정, 분과제도(分課制度)의 시행, 대여규정의 제정 등 창립이후 4개월 간 은행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내용은 일지 형식이고, 1899년 1월 29일 창립 주주총회부터 1899년 5월 26일 탁지부 훈침을 인천부 및 개성부에 시달까지 기록되어 있다. 대한 천일은행은 1899년 1월에 창설된 근대적 금융기관의 선구가 되는 민족계 은행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래 일본 금융업계의 대한(對韓) 진출이 뚜렷해지자, 우리나라의 지배층과 상인들은 민족자본으로 은행을 설립하여 경제파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발기인은 탁지부대신과 군부대신을 역임한 심상훈(沈相薰), 농상공부 대신이었던 민병석(閔丙奭),과 육군부장 민영기(閔永綺), 법부협판 이근호(李根澔), 전환국장(典?局長) 이용익(李容翊), 원수부군무국장(元帥府軍務局長) 조동윤(趙東潤) 등 현직고급관료들과 송문섭(宋文燮), 정영두(鄭永斗), 김기영(金基永), 김두승(金斗昇), 박경환(朴景煥) 등 고급관료층과 밀접하였던 상인들이었다. 민병석이 은행장이었으며, 공칭자본금 5만6천원과 불입자본금 2만8천원으로 발족하였다. 그러나 이해 3월까지 불입된 주금(株金)총액은 4,800원이었던바, 고급관료층에서는 민병석, 민영기, 이근호가 400원씩 불입하였다. 이같이 은행 설립에 필요한 주금 불입에 있어 고급관료들보다 실업인들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으나, 나머지 자본금의 불입이 여의하지 않자 정부로부터 국고금 5만원을 5년 상환기간으로 대여 받았다. 국고금 대여와 더불어 은행장에는 영친왕, 부은행장에는 이용익이 취임, 이때부터 은행의 성격은 누구나 이용하는 일반은행이 아닌 황실이나 고위층 인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특수은행으로 고정되었다. 이러한 성격변화로 은행설립의 실질적인 출자자였던 실업인들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1905년 경제계의 불황과 자본의 약소 등을 비롯한 경영상의 실패로 1906년 6월부터 약 1년 동안 휴업하게 되었다. 1906년 6월 자본금을 15만원으로 증자하고 경영진의 쇄신을 위하여 취체역에 김기영, 윤정석, 조진태, 백완혁 등 4명을 선출, 은행경영을 실업인들에게 맡겨 민영은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재정고문 메카다(目賀田種太郞)의 알선으로 정부로부터 25만원의 자금을 무이자로 대여받은 것을 계기로 일본인을 기용하게 됨으로써 처음으로 일본인 세력의 침투를 허용하게 되었다. 1906년 동막(東幕: 지금의 마포)에 출장소를 개업하였고, 1908년에는 남대문에 출장소를 개설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일제는 ‘대한’이라는 용어를 폐기하도록 하였으며, 결국 1912년 2월 상호를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여 오늘의 한국상업은행으로 발전하였고, 현재는 우리은행이 되었다.